먼저 이 책을 어떻게 접했는지부터 얘기해야겠다. 가깝게는 껌정드레스님의
리뷰였다( http://blog.yes24.com/document/11586826). 극찬을 아끼지 않은 감상평이었다. 그러나 이미 이 책에 대해서는 어디선가
들은 바가 있었다. 이 책을 읽고자 앞에 두고 그게 어떤 책에서였는지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었다. 잘 떠오르지 않다 다음 읽을 책으로 점찍어두고 옆에 둔 책에 눈길이 갔다. 서경식
선생의 《나의 영국 인문 기행》. 맞아, 그 책이었어. 서경식 선생의 전작(前作)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이었다. 그는 이미 이 책을 일본어로 읽었던
거다.
당연히 스가 아쓰코라는 이의 삶이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1929년생. 1950년대 초반 프랑스 파리 유학. 일본으로 귀국했다 다시 이탈리아로
유학. 1960년에는 밀라노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이탈리아인 주세페 리카와 결혼. 남편은 1967년 갑자기 병을 얻어 죽고, 1971년 13년 간의 이탈리아 생활을 접고 일본으로 돌아온다. 이 책이 일본에서 발간된 것이 1990년이니 아마도 1980년대 말에 쓴 글일 것이다. 1950년대, 1960년대 이탈리아 생활을 회고하고 있는 셈이니, 글을 쓰는 시점에서도 2, 30년 전의 일인 셈이다. 그만큼 그녀의 이탈리아 생활은 그녀의
삶에 각인되어 있었고,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도 그곳에서의 생활과 완전히 분리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2, 30년의 세월은 긴 세월이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지만, 그 기억을 확신하지 못한다. 논리상 맞지 않는 기억을 떠올리고는 스스로 당혹스러워도 한다. 그러나
그런 당혹스러움은 호들갑스럽지 않다. 그때 그렇게 느꼈거나, 그때
그렇게 느꼈다고 지금 떠오르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어차피 기억이란 왜곡을 전제로
한 것인 만큼, 나의 기억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 왜곡된 기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도 자연스럽다. 우리가 그녀의 글을 읽는 것은 그녀의 기억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읽는 것이다.
이런 과거에 대한 기억을 쓴 글은 종종 감상적이고, 또 관념적인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스가 아쓰코의 글은 시종 담담하다. 또 관념을
벗어난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사람을 회상하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떠올리기 때문으로 보인다. 도시를 도시 자체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 그 이후의 관계를 통해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밀라노도, 피렌체도, 베네치아도, 로마도
다 살아 있다. 지금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겠지만,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도 이미 오랜 과거가 되어 있을 그 도시에 대한 기억이 의미가 있는 이유다.그녀가 쓰고 있듯 ‘먼 나라 먼 시간의 사람’에 대해 쓰고 있지만, 그 사람들은 바로 그녀의 삶을 구성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마리아 보토니의 여행이다. 그녀가 어찌어찌해서
‘레지스탕스의 영웅’이 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이탈리아로 귀환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얘기도 흥미롭지만, 그보다
일본으로 저자를 찾아왔을 때 3주 동안 교토 말고는 어디로도 가지 않고 그녀의 집에 기거하게 된 데
대한 저자의 뒤늦은 깨달음이다. 아쓰코는 그런 그녀를 불편해 하기도 하고, 일본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지고 가게 될까 걱정했지만, 그녀의 삶에
대해서 듣게 된 이후 아쓰코는 생각을 달리 갖는다. 이렇게 썼다.
“여든 살을 바라보는 마리아가 나를 만나러 먼길을 와주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극히 일상적인 행위였다. 평상복 차림으로
제노바에서 나를 맞아준 마리아는 레지스탕스 때도 같은 옷을 입고 싸웠고, 일본에도 마찬가지 모습으로
찾아왔다. 일본이라는 ‘구경거리’를 보러 온 게 아니라 평상복 차림의 나라는 인간을 만나러 온 것이다.”
(148쪽)
- 이런 평범함이 감동적이다.
그 밖에 내가 밑줄 친 부분이 딱 하나인데, 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전체를 평균화, 표준화해버리려는 히스테릭하고 과시욕 강한 일종의 파쇼적
평등화보다는, 엄격한 자기관리를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사고로 나아가려는, 혹은 회귀하려는 움직임” (23쪽)
기억 속 밀라노에는 지금도 안개가 고요히 흐르고 있다.
인생에 지울 수 없는 궤적을 남긴 밀라노 생활에서 만난 문학과 친구, 도시의 정경을 회상하는 스가 아쓰코의 첫 작품집. 세월과 함께 아련한 기억 너머로 사라진 이들의 흔적을 사려 깊게 더듬어가며, 십삼 년간 거주했던 밀라노 외에도 베네치아, 나폴리, 페루자, 트리에스테 등의 도시와 명소를 돌아보며 받은 감회를 유려하게 풀어냈다. 한 편의 서정시를 연상시키는 표제작을 비롯한 열두 편의 에세이 중 여섯 편은 움베르토 사바, 조반니 파스콜리, 알레산드로 만초니,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등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문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글로 이루어져 있어 번역가와 문학자로서도 익히 인정받은 작가의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예순 살 신인’의 데뷔작이라고 믿기 힘든 노련함과 문학적 완성도를 높이 평가받아 제30회 여류문학상과 제7회 고단샤 에세이상을 수상했다.
저녁 무렵 창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안개가 자욱이 깔리곤 한다. 창에서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플라타너스의 가지 끝이 눈 깜짝할 사이 자취를 감추고, 끝내 굵은 줄기까지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가로등 밑을 생물처럼 달려가는 안개를 본 적도 있다. 그런 날에는 몇 번이고 창으로 달려가 짙은 안개 너머를 내다본다. _본문에서
스가 아쓰코가 밀라노에서 생활하던 시절의 서유럽은 역사상 인간 정신이 가장 고상하게 발현된 시기였을 것이다. 그녀의 시선은 신분, 학력, 피부색, 국적, 나이, 빈부 너머 사람들의 표정이나 눈빛, 목소리, 마음에 직접 가닿는다. 사람을 그야말로 사람으로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잊게 한다. _송태욱(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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